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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QT나눔

영성일기, 영성일기 쓰는법, 선한목자교회 주바라기, 예수님과 24시간 동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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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영성일기를 쓰기로 선포하자 많은 분들이 댓글을 달아주셨습니다. 영성일기를 어떻게 쓰는지 많이 문의주시더라구요.
사실 저도 어떻게 쓰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선한목자교회 유기성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감동을 받아 아무렇게나 쓴 글입니다. 그저 제목을 제가 영성일기라고 지었을 뿐입니다.
저만 영성일기를 처음 알게 되었고, 많은 분들은 이미 영성일기를 쓰고 있는 줄 알고 있었는데, 이번 트위터와 페북의 댓글을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우측에 있는 사진처럼 영성일기를 쓰시면 안된다는 것을 영성일기 쓰는 법을 찾다가 알게 되었네요. 그러나 영성일기를 어떤 틀에 갖춰서 꼭 써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 쓰던 일기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잖아요.
영성일기 쓰는 방법이 율법이 되어, 그걸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거나 주님과 동행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오히려 영성일기를 자유형식으로 쓰시기를 개인적으로 권해드립니다.
영성일기가 무엇이고 영성일기를 어떻게 쓰는지 찾아보았는데요. 중요한 영성일기의 핵심은 24시간 주님과 동행하기가 아닐까요?

영성일기는 선한목자교회에서 시작된 영성운동으로 1차는 선한목자 교인을 대상으로 홈페이지에 적는 개념입니다. 비선한목자교인들도 영성일기를 홈페이지를 통해 쓸 수 있는데요. 
선한목자교회 교인이시라면 영성일기 홈페이지를 활용해 영성일기를 쓰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선한목자교회 교인이 아니시라면 아래 영성일기 사용 가이드만 참고 하셔서 개인적으로, 또는 공동체모임에서 활용하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개인적으로는 바인더나 다이어리에 직접 손으로 쓰는 것을 강력 추천합니다. 너무 디지털화 되어 손으로 글 쓸 일이 너무 없어진 요즘 하나님과 친필로 만나보시면 어떨까요?

24시간 주님 바라보기 - 영성 일기 쓰는 법
(아래글의 출처는 선한목자교회 영성일기 홈페이지이며 제가 재편집한 내용입니다.)
영성 일기란,
하루 동안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얼마나 주님을 의식하고 지냈는지를 기록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을 계속 바라보면 점점 주님의 생각과 마음에 나의 마음과 생각을 맞추게 되는데, 그 주님의 마음과 생각에 순종한 일들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일기의 초점이 자기 자신의 활동이라면, 영적일기의 초점은 주님의 일하심입니다)


영성일기를 쓰는 목적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일을 훈련하기 위함입니다. 하루 동안 얼마나 주님을 의식하고 있는지를 점검해보면 주님을 거의 바라보지 못하고 지낸 것을 깨닫게 됩니다. 대부분 주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사는 것 조차 모르고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기를 써보면,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식하려고 하면, 제일 먼저 주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온 삶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주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온 삶을 깨닫게 된 순간이 바로 내 믿음의 실체를 보는 순간입니다. 내가 믿는다고 하는 것은 생각과 마음의 고백일 뿐, 주님과는 실제적인 교제가 없는 믿음임을 보게 된 것입니다.

주님 바라보기의 첫 단계 - 주님을 의식하는 삶에 대한 좌절

그런데 주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온 것을 깨달았다고 해서 바로 주님 바라보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의식하고 사는 삶에 대한 좌절과 갈망이 생기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주님을 의식하고 살아야지'하고 다짐해도 계속해서 경험되는 것은 주님을 계속 잊고 지낸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다 주님바라보기 훈련을 시작하면서 겪게되는 문제입니다. '나는 안되나봐. 못하겠어' 하는 좌절이 옵니다.
그렇더라도 꾸준히 다시 시작하고, 또 다시 시작해 보십시오. 열흘만 지나도 달라지게 됩니다
<주님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지내는 단계>에서 "또 잊고 지냈구나" 하는 <좌절을 경험하는 단계>로 옮겨지게 되고, 그 좌절을 지나서 <점점 주님을 의식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작하자마자 엄청난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식으로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24시간 주님 바라보기, 이렇게 시작하십시오
.

첫번째,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예수님!” 하고 부르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잠자리에 들 때, "예수님"을 부르면서 주무십시오.
잠자리에서 일어난 후 언제부터 예수님이 생각났는지부터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예수님" 하고 불렀다면 예수님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르면서 '예수님 저와 함께 하시지요' '예수님 저를 인도해 주세요' 하면서 일상 생활을 계속 하며 잠잠히 주님이 하시는 것을 기다리면 됩니다. 그리고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되어지는 일들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경험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주님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눈을 뜨면서부터 주님을 의식할 수 있을까요. 하루의 마감이 중요합니다.잠자리에 들 때, 주님을 의식하십시오. 잠잘 때에 조차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께 무의식속, 꿈 속에서조차 나를 주관해주시길 기도하고 주무십시오. 아침에 눈을 뜰 때가 달라집니다.


두번째, 영성 일기를 기록하십시오.

영성일기는 미주알 고주알 생활 일기가 아니라 하루를 살면서 매 순간 주님을 생각하였는지, 그랬더니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를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는 일에 실패했으면 실패한 대로, 예수님을 생각하였다면 그대로 써 보십시오. 써 보면서 마음이 정리되고 분별이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과 생각이 명확하게 됩니다.자신이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자신이 놀라게 됩니다.


세번째,
영성일기는 꾸준히 써야 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고 마치 초등학교 학생의 일기장을 보는 것 같은 모습에 스스로 부끄러워서 계속 일기를 쓸 마음이 잘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잘되던 안되던 꾸준히 쓰겠다는 결심을 먼저하고 시작하십시오. 쓰기 시작하면 영적 점검 일기를 쓴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놀랍게 정리됩니다. 생활이 달라집니다.

다니엘 1:10-21에서 다니엘이 환관장에게 '10일을 시험하여 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10일간만 시험해 보십시오, 10일이 충분하진 않지만 세상이 주는 기쁨 보다 더욱 놀라운 은혜의 시간을 경험하는 기간으로는 충분합니다.


네번째, 영성일기를 나누는 공동체를 만드십시오.

영성일기를 계속 꾸준하게 쓰고, 주님 바라보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나눔의 공동체를 갖는 것이 유익합니다. 나눔 공동체는 쓰러지고 넘어질 때, 서로를 붙잡아 일으켜 세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공동체 나눔방은 온라인 혹은 오프라인으로 만들되, 안전한 공동체에서 나누도록 해야 합니다. 6~7명의 동성으로 구성하여 불필요한 오해와 사탄의 시험을  방지합니다. 

다섯번째, 일기가 공개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영적 일기를 쓰라 하니 사람들에게 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마음을 감추고 사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오신 주님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만 감춘다고 감춘 것입니까? 주님 앞에 설 때 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도록, 주님으로 옷입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옷을 벗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미 우리는 벗은 자들입니다. 선악과를 먹고나서 죄가 우리 안에 들어온 다음, 그 부끄러움을 말라버릴 나뭇잎으로 가리고 있는 형국일 뿐입니다 벌거벗는 것이 두려운 일이 아니고, 죄가 우리에게 벌거벗은 것이 두렵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일 때문에 솔직하지 못할 것에 대한 염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성일기를 쓰고 나누다 보면, 솔직한 것과 정직한 것의 차이를 알게 됩니다. 24시간의 모든 생활을 다 나누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누다 보면, 구태어 감출 필요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집안을 치우지 못하고 치워야지 생각만 하다가 손님이 오면 금방 치워집니다. 집을 여니 집이 치워지는 것입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열면 주님이 오시고 우리 마음은 정리됩니다. 은밀한 죄 짓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해집니다.


여섯번째, 성경 읽기와 큐티를 함께 하십시오.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생각하기를 지속적으로 하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과 실제 대화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성경 말씀을 통하여 가장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말씀을 읽으면 어떤 생각이 주님의 말씀인지, 마귀의 생각인지, 나의 생각인지 말씀을 통해 분별이 됩니다. 마음의 생각의 뿌리가 다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음성을 듣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심지어 마귀가 주는 생각을 따라 사는 교인도 많습니다.

삿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행 5: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가 충분해야 주의 인도하심을 풍성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이 생각나는 상황을 만나게 하시고, 부딪힌 상황에 대한 해답을 말씀 속에서 주십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 주님의 음성을 듣는 차원이 달라집니다.


일곱번째, 생각에 파숫꾼을 세우십시오.

주님을 바라보는 일은 생각 속에서 제일 먼저 이루어지는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에 파숫꾼을 세우십시오.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는데, 주님 생각이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마귀는 생각으로 우리를 공격합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돼? 언제까지 해야돼?' 생각에 파숫꾼을 세우면 말이 달라집니다. 말은 생각의 지배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판단하던 것들을 내려놓고 주님을 바라보면, 판단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기 때문에 말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말들이 불쑥불쑥 나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이사야의 입술로 만들어주시기를 구해야합니다. 일단 말을 멈추고 주님을 바라보면, 생각이 다시 정리되고, 해야 할 말과 아닌 말이 구분됩니다.


여덞번째, 깨달은 주님의 음성이 있다면 오직 순종만 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친히 동행하시는 놀라운 체험을 삶과 사역을 통하여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 바라보기는 순종으로 주님과 함께 가는 길입니다. 순종을 통해 더욱 풍성한 주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일기에 쓰십시오.


아홉번째,온라인 나눔방의 경우, 서로 적극적으로 댓글을 달아줍니다.

댓글을 적극적으로 달아주는 것이 얼마나 나눔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지 모릅니다. 아멘으로 화답함으로 다른 이가 깨닫고 느낀 영적인 축복을 공유하게 됩니다. 또한 글쓴이에게 주의 마음을 전달하는 통로가 됩니다.


열번째, <교회게시판-영성일기>에 적극 참여합니다.

영적성장을 위해서는 닫힌 나눔방에서 나누지만, 영성일기,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삶의 확산을 위해서 게시판에 나눠주세요. 나눔방에서 나눈 글 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함께 나누고 싶은 글, 은혜가 되는 글들을 올려주시면, 은혜가 계속 확산됩니다.


열한번째, 컴퓨터를 사용할 때마다, 인터넷이 죄의 확산을 위해 쓰임받지 않고, 은혜의 확산을 위해서 쓰임받도록 기도하고 시작해 주십시오.

영성일기 작성시 주의할 점

첫번째,주님을 느끼려고 하지말고, 계속되는 믿음의 고백을 통해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바라보는 일은 막연한 주님과의 관계를 실제적인 것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그러나 함께 계시는 주님을 의식하는 것을 오감으로 느끼려고 하면 미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영적인 성찰, 영적인 느낌 등에 좌우되지 마십시오. 날마다 요동치는 감정을 주목하면, 넘어지게 됩니다. 오직 우리의 느낌과 상관없이 늘 함께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두번째, 넘어지게 될 경우,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짜증나는 감정, 우울한 감정 등은 주님 바라보기를 놓칠 때 찾아옵니다. 왜 이럴까를 집중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언제부터 주님을 놓쳤는지를 생각해보고, 그 지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십시오. 반성하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주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초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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