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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설교모음

하용조 목사 설교, 예루살렘 성에 살게된 사람들, (느헤미야 11장1절에서 3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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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용조 목사님의 2010년 12월 12일 온누리교회 주일 설교입니다.


느헤미야 11장 1~3절, 7장 4절_ 하용조 목사

 

역사의 끝이 곧 오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사는 세상을 깨끗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어야 합니다. 죽어가는 영혼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할 일이고, 우리가 사는 이유입니다.

 

말씀에 대한 갈급함

 

오늘 설교 제목은 ‘예루살렘 성안에서 살게 된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 성안에 살게 된 사람들이 왜 중요할까요. 그 당시 예루살렘 성은 사람들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만한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성벽은 무너지고 성문은 훼파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도적과 강도들이 많았고, 짐승들도 많고, 풀이 무성하게 자라난 상태라 아무도 그 안에 살고 싶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집도 주인이 살지 않으면 그 집은 썰렁하고 폐허가 됩니다. 유리창이 깨지고 물건도 모두 없어집니다.
비록 성벽을 재건하고 성문을 다시 세웠지만 아직도 예루살렘 성안은 썰렁하고 강도와 도적이 창궐했을 것입니다. 그 상황을 상상해보십시오. 누가 거기에서 살려고 하겠습니까. 아무리 예루살렘 성이라 할지라도 그곳을 모두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 피해를 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연평도 사건이 터졌는데, 그 섬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언제 또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불안하고 공포스러울 것입니다.
느헤미야와 하나님의 종들은 힘을 합쳐서 성벽을 건축했습니다. 성벽을 건축하고 나니까 일단 외부세력으로부터의 공격은 막게 됐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상하게도 허전했습니다.
인간의 심리가 큰일을 치루고 나면 허전함을 느낍니다. 왜 허전할까요. 그것은 말씀에 대한 갈급함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해 삶을 돌아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고향으로, 집으로 돌아갔지만 어쩔 줄 몰랐습니다. 집을 지을 때는 집짓는 게 목적이었는데 집을 다 짓고 나니까, 성벽을 고치고 나니까 마음이 갈급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학사 에스라를 불러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학사 에스라가 설교를 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말씀을 그대로 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을 듣다보니까 마치 거울을 보듯이 자기 자신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진짜를 보니까 자기 내면에 있는 가짜가 보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을 듣는 순간 ‘내가 잘못 살아왔구나, 내가 변명하면서 살아왔구나, 내가 위선적으로 살아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이 사람들은 마음 가운데 찔림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거기서 좀 더 깊어져서 금식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벽을 재건한 후 이스라엘 사람들의 형편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진짜 말씀을 듣고 가짜로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조목조목 적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서명했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 10장까지의 이야기입니다.

 

내면의 문제

 

이제 당면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외적으로는 성벽을 다 재건했고 말씀을 들었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까 이스라엘 성벽을 쌓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내부의 문제를 보게 된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가장 먼저 자기의 거짓된 겉모양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위선자로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말씀을 받으면 내 내면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부서진 집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난 땅, 파헤쳐진 길, 사람이 살 수 없는 이스라엘 내면의 세계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의 첫 단계에서는 자신의 외면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깊어질수록 자신의 내면을 보게 됩니다.
에스겔서에서도 보면 성전에서 물이 나오는데 처음에는 발목까지 차오릅니다. 그러다가 무릎까지 차오르고, 그 다음에 허리까지 차오르고, 그다음에 가슴까지 차오릅니다. 나중에는 헤엄칠 수밖에 없을 정도가 됩니다. 자신의 신앙 상태가 발목까지 찬 신앙인지, 무릎까지 찬 신앙인지, 허리까지 찬 신앙인지 잘 모르다가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의 신앙 상태를 보게 됩니다.

 

지도자의 희생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러면 과연 누가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서 살겠느냐는 것입니다.
11장 1절을 읽겠습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살게 됐습니다. 나머지 백성들에 대해서는 제비를 뽑아 10분의 1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살게 했고 그 나머지 10분의 9는 각자 자기의 성읍에서 살게 했습니다.”
잡풀이 무성하고, 집은 고쳐야 하고, 여우들과 쥐가 들락날락하는 성 안에 들어가서 살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백성들의 지도자였습니다. 여러분, 지도자가 모범을 보이면 백성들은 기쁘게 따라갑니다. 지도자가 희생하면 따르는 자도 희생합니다. 그러면 고통이 축제가 되고,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그 도시는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이번에 연평도 사건을 보면서 대통령께서 “최고의 안보는 국민이다. 국민이 한마음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도 두말할 것도 없이 이스라엘 성으로 들어가 살자고 했던 것입니다. 아이들이 좋았겠습니까. 부인들이 좋아했겠습니까. 남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섭고 험악한 도시에 들어가서 산다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두 번째로 재미있는 것이 나옵니다. 제비를 뽑아 10분의 1은 예루살렘 성안에 살게 했다는 것입니다. 왜 제비를 뽑았을까요. 성안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황을 피하는 것이 정상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씀을 받고 나자 ‘내가 하나님의 집을 이렇게 버려둘 수 없다. 쓰레기를 치우고 부서진 집을 다시 재건하고 도로를 만들고 깨끗하게 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불타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원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래서 10분의 1을 예루살렘 성안에 살도록 했습니다. 

 

제비뽑기는 하나님의 선택

 

제비를 뽑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제비뽑기란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다는 확신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에는 고난이 따르지만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 땅을 분배할 때도 제비뽑기를 합니다. 땅을 분배할 때 각 족속들이 서로 좋은 땅을 가지려고 하자 제비뽑기를 한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세워달라고 할 때도 제비를 뽑았습니다. 가룟 유다 대신에 맛디야를 선택할 때도 제비를 뽑았습니다.
결국 제비뽑기라는 것은 사람이 후보자를 세웠지만 선택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을 나타냅니다.
모두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가서 살기를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10분의 1만 그 성에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성안에 들어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들은 고난과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위험한 밤도 무섭지 않았을 것입니다. 먹을 것도 없고, 험악한 도시지만 그들은 최선을 다해 그 도시를 깨끗하게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스라엘을 여러 번 여행했지만 팔레스타인 쪽으로 가면 매우 지저분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일본처럼 깨끗했습니다. 반듯하고 냄새도 나지 않는 것이 팔레스타인과 대조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는 곳은 그렇게 깨끗하고 늘 단정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거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거지를 만들지 않습니다. 부자를 만들어주지는 않아도 굶지는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10분의 1을 제비뽑았다는 것은 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교회에서 일할 재직을 뽑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선교사로 파송 받게 되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자녀들의 교육도 포기해야 하고, 안락한 가정의 삶도 포기해야 합니다. 직장도 포기해야 합니다. 선교사로 가기로 결정하는 순간 포기할 게 너무 많습니다.
또한 교회에서 직분자가 되면 더 많은 시간을 내야 하고, 봉사도 남들보다 더 많이 해야 하고, 헌금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가는 오해를 많이 받고 비난도 많이 받는 것입니다.
그래도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고 직분자를 세우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선택 때문입니다. 선택을 받았다는 확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으면 선교사로 못나갑니다.
여러분, 교회 일도 부르심이 없으면 일에 지치고, 짜증나고, 무관심하게 됩니다. 재직이 된다는 것이 명예직입니까. 집사 되고 권사 되고 장로 되고 목사 되는 것이 명예입니까. 아닙니다. 고생하는 길입니다.
동경 온누리교회를 담당하고 있는 장재윤 목사님께서 어느 날 “어떤 분이 너무 목회가 힘들어서 불평을 해서 ‘당신 목사가 뭔지 아시오? 밟히는 것입니다. 영광 받는 게 아니고 밟히는 게 목사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라고 제게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영광 받고 박수 받기 위해 선교사가 되겠습니까.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고 선교사가 되겠습니까. 교회에서 좀 더 높은 지위에 있기 위해서 장로가 되고, 집사가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마치 무너진 이스라엘 성안의 모습을 보면서 너도 나도 그 성안에 들어가서 내가 먼저 가서 청소하고 내가 먼저 가서 집을 회복하고 내가 먼저 가서 하나님의 집을 깨끗하게 만들겠다는 열정에 불타는 사람에 의해서 회복된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교지로 갔을까요. 돈도 없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지만 그들은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미전도종족을 본 것입니다. 그는 ‘내가 가지 않으면 저 사람들이 죽겠다’는 생각에 가는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에서 떠나려고 했을 때 하나님이 열감기로 쓰러지게 하셨습니다. 그때 그가 본 환상이 있습니다. 그는 수많은 중국의 영혼들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본 것입니다. ‘내가 가지 않으면 누가 가겠는가’라는 생각에 자진해서 광야를 향해 간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와 같은 선교사들은 영적 내면의 세계를 본 것입니다. 그들이 여행 가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이 있을 줄 알면서도, 비난 받을 것을 알면서도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떠났던 것입니다.

 

축복하는 사람들

 

이스라엘 백성 중 제비뽑기에서 뽑히지 못한 10분의 9가 있습니다.
우리는 장로 선거를 할 때 선출되지 못하면 1년 동안 화를 내기도 합니다. ‘왜 내가 떨어졌나’라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왜 그렇게 상처를 받을까요. 상처를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상처를 주면 ‘No’ 하시기 바랍니다. 상처를 받지 않으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처를 너무 잘 받습니다. 마치 무너진 성처럼 마음이 쉽게 무너집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뽑히지 못한 나머지 10분의 9는 어떻게 됐을까요. 그 사람들은 예루살렘성에 못살고 성 밖에서 살았습니다. 성 밖에서 어떻게 살았을까요.
11장 2절을 읽겠습니다. “또 모든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살기로 자원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예루살렘 성안에 들어가서 청소도 못하고, 집도 못 짓고, 예루살렘 성전을 복구하는 일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성 밖에서 살면서 성안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축복해주었습니다.
여기서 보냄을 받는 사람들과 축복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이것이 바로 참된 교회의 모습니다. 교회는 아름답습니다. 교회에는 감격이 있습니다. 교회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교회 오면 이런 것들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무너졌던 마음이 회복됩니다. 내가 비록 제비뽑기에서 뽑히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제비 뽑힌 사람을 축복하고, 뒤에서 기도해주고 응원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유는 복음 전하는 것

 

7장 4절을 읽겠습니다. “그 성은 크고 넓은데 성안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 없고 제대로 지은 집들도 아직 얼마 없었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안은 형편없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깨끗한 도시를 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누구든지 안전한 도시를 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벽만 중요한 게 아니라 성전과 그 도시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서로 자원해서 거기 가서 살았습니다.
저는 영국의 교회가 점점 줄어드는데 조금씩 성장하는 그룹을 봤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정교회, 셀 그룹이었습니다. 어떤 셀은 10명 정도의 성도가 모이는데, 그들 모두 한 아파트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모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동네를 청소하기 시작했고, 아픈 사람을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하나둘씩 모여들어 그 타운을 복음화시켰습니다. 그 셀은 한 타운을 복음화시키고 나면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갑니다. 그들은 학군이 좋아서 집을 옮기는 것이 아니고, 투자 가치가 높은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팀을 이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보는 눈은 달랐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선교사로 가지는 못하지만 ‘어떻게 하면 내가 사는 도시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헌신입니다. 순종입니다. 천국의 기쁨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회개한 사람만이 그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할 일이 많았겠습니까. 폐허된 도시, 잡풀이 무성한 도시, 습격당한 도시,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도시, 사람도 없는 도시에 그들이 가서 그 도시를 살려놓는 것입니다.
한 번도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원주민들 속에 들어가서 죽음을 각오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브라질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휘튼대학을 졸업한 매우똑똑한 청년들이 결혼하자마자 다섯 가정이 아오카족을 전도하기 위해 그 땅을 밟았습니다. 그런데 아오카족들은 외부 사람들을 만나면 그냥 죽였습니다. 자기 동족이 아니면 죽여버렸습니다. 다섯 명 모두 냇가에서 원주민들에게 피살당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군인들이 들어가서 시체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남편을 잃은 부인 중 몇 사람이 다시 아오카족에게 갔습니다. 아오카족들이 “너희 남편을 우리가 죽였는데 왜 또 왔냐”고 물었을 때 순교한 선교사들의 부인들이 “예수를 전하러 왔다”고 대답했답니다. 그래서 그 원주민들이 감동해서 마을 전체가 모두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실화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우리가 할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유입니다. 이 세상 전부는 아니지만, 역사의 끝이 곧 오지만 그래도 우리가 사는 세상을 깨끗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어야 합니다. 죽어가는 영혼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게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열정과 헌신

 

느헤미야 11장에는 이렇게 예루살렘 성안팎에 사는 사람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11장 3절부터 9절까지 지도자들의 이름이 기록돼 있습니다. 10절부터 14절까지에는 레위자손의 이름이 기록돼 있습니다. 19절부터 24절까지에는 성문지기의 이름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25절부터 36절까지에는 성 밖에 살게 된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돼 있습니다. 성안에서 살든지, 성 밖에서 살든지 모두 하나님 나라의 일에 참여했다는 의미입니다. 
성벽은 이미 세워졌고 성안의 도로를 다시 건설하고 건물도 다시 지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이 얼마나 고단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열정과 헌신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교회에서 중요하지 않는 주제를 가지고 너무 심각하게 싸우기도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잘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기쁘게 자원한 사람들, 하나님께로부터 선택받은 사람들이 되십시오. 영적 지도자들이 되십시오. 그래서 쉽게 가지 못하는 곳에 자원해서 가고, 사람들이 살 수 없는 곳일지라도 그 민족 가운데 자신을 던지는 계기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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